한화, 결정적 순간
'급성장' 한국화약에 걸린 브레이크
② 이리역 폭발사고 이어 창업주 타계…바통 넘겨받은 김승연
이 기사는 2020년 07월 27일 14시 38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팍스넷뉴스 정혜인 기자] 끝없이 승승장구 하던 한화그룹에 1970년대 후반 쯤부터 먹구름이 드리웠다. 한국화약의 폭발물을 싣고 가던 화물열차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일어나 건물들이 파괴됐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면서, 그룹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만났다. 인명사고에 따른 죄책감을 이겨내기 어려웠던 탓일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창업주 故 김종희 회장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인 김승연 현 한화그룹 회장이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경영을 물려받았다.


화약·화학 부문에 이어 자본시장에서까지 활약을 떨치며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화그룹에 1977년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현재 익산역(옛 이리역)에서 한국화약의 화약 40톤을 싣고 가던 열차가 폭발했다. 당시 주택 7866채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철도원 9명과 시민 등 59명이 사망했으며 134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한화그룹의 악재는 이 사고가 끝이 아니었다. 인명사고에 따른 죄책감이 컸던 탓일까. 전 재산 90억원을 피해보상금 명목으로 내놓는 등 몇 년간 사고 수습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故 김종희 회장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1981년 7월, 그는 서울 가회동 자택에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폭발 사고가 있기 전(1970년대 중반)까지, 한화그룹은 사업 다각화 노력이 성과를 본격화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룹은 한국화약의 기업공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의 입김에 의해 대출·사채 등 타인자본에 의존하던 기업들이 자금조달 관행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부분도 영향을 줬다. 1973년부터는 정부가 공개대상 법인을 심사, 선정하고 공개를 명하는 '기업공개촉진법'을 본격 시행했으며, 기업들 가운데 이를 어기지 않으면 세제, 금융상의 불이익을 줬다. 이 같은 흐름에 한국화약은 1976년 실무팀을 가동해 기업공개 준비에 들어갔고, 같은 해 6월 증권시장에 상장해 9억8300만원을 공모하는 데 성공했다.



더 나아가 한화그룹은 또 다른 도전을 했다. 정부 주도로 자본시장이 빠른 성장세를 보이자 자본시장의 핵심 플레이어인 증권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한국화약이 상장할 때 즈음인 1976년 5월, 한화그룹은 성도증권(현 한화투자증권)을 인수하고 관련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폭발 사고와 갑작스러운 故 김종희 회장의 죽음은 끝을 모르고 날아가던 한화그룹에 다른 국면을 가져다줬다.  2세 경영시대의 개막이다. 


차기 회장 후보로는 이미 장남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유력했다. 당시 김승연 회장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태평양건설(현 한화건설) 해외수주담당 이사, 해외담당 사장을 거쳐 그룹 관리본부장으로서 4년여 동안 경영수업을 받았을 때였다. 일각에서는 경력이 짧고 나이가 어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 집단 중 하나인 한화그룹을 이끌어 갈 자격이 충분치 않다는 지적을 제기하기도 했다.


다만 그룹 사장단들은 故 김종희 회장의 장례가 끝난 직후 회의를 열고 김승연 회장을 그룹을 새롭게 이끌어 갈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했다. 한화그룹은 1981년 8월1일부로 2대 회장 체제인 '김승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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