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PF 대출
이 기사는 2021년 01월 05일 11시 12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팍스넷뉴스 이상균 건설금융팀장] 1990년대 후반 IT 붐을 타고 벤처투자 열풍이 불었던 시기. 수많은 벤처기업들이 오직 미래 성장성과 사업성만으로 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 기업들이 현재 사라지긴 했지만 이 같은 투자 덕분에 오늘날 네이버와 같은 대형 IT기업이 탄생하는 선순환 효과가 나타났다. 당시 벤처캐피탈이라는 금융회사가 담보도 없이 벤처기업에 수십억원을 투자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이제 벤처투자 시장은 연간 5조원을 형성하는 성숙한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건설부동산 시장에도 이와 유사한 투자 방식이 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다. 엄밀히 말해 투자는 아니지만 시행사가 보유한 토지와 향후 사업성(분양 성공 가능성)만을 보고 대출해준다. 건당 대출 규모는 많게는 수천억원에 달한다. 땅을 가지고 있는 시행사는 전체 사업비의 20%만을 출자하고 나머지를 PF 대출로 조달하는 구조다. 땅만 괜찮다면 대형 건설사가 PF 보증을 제공하기도 한다.


국내 PF 대출의 실상은 알려진 바와 상당히 다르다. 오직 사업성만 보고 평가한다는 허울과 달리, 시행사가 보유한 또 다른 토지, 심지어 다른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분양대금을 담보로 설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담보를 잡지 않은 PF 대출을 찾기가 손에 꼽을 정도다. 업계에서는 1위인 엠디엠 정도만 담보설정 없이 순수 PF대출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시행사라고 평가한다.



어느 시장에서든 돈을 가진 자는 갑이다. 대부분의 룰도 갑의 관점에서 설계가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PF 대출 시장 역시 돈을 쥔 은행과 증권사의 입맛에 맞게 돌아간다. 이들은 대출을 통해 예대마진을 거두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각종 수수료를 붙여 추가 수익을 가져간다. 당장 자금이 급한 시행사는 이런 관행이 불합리하게 느껴지지만 이에 대항할만한 힘이 없다. 묵묵히 금융회사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금융회사에게 기울어진 PF 시장의 관행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믿기지 않겠지만 IMF 외환위기 이전, 시중은행의 대리급 직원이 대기업의 재무담당 임원을 호출해 호통을 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오죽하면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도 명동 사채시장을 기웃거리던 시절이다. 


하지만 저금리로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해지고 기업들의 보유현금이 어마어마해지면서 힘의 구도는 완전히 역전됐다. 적어도 대기업들은 이제 시중은행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PF대출 시장도 비슷한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장에 유동성은 풍부해지만 반대로 서울과 수도권 등 사업성이 보장된 지역의 택지 공급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돈을 가진 자에서 땅을 가진 자로 권력이 이동하기 마련이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붙는다. 땅뿐 아니라 금융회사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금융회사들과의 거래를 법적으로 꼼꼼하게 살필 수 있는 능력도 필수다. 시행업계에 시장의 룰을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가 등장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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