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乙'이 중요한 시대
미래 산업 패러다임, 경쟁력 갖춘 공급자가 이끈다
이 기사는 2021년 02월 10일 08시 40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팍스넷뉴스 설동협 기자] '을' 보다는 '갑'. 흔히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불변의 법칙으로 작용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갑의 위치에 서기 위해 알게 모르게 부단히 노력하곤 한다. 


그런데, 가끔은 을 중에서도 변종이 나타나곤 한다. 바로 '슈퍼을'이다. 슈퍼을은 상대방에 비해 지위가 낮음에도 우월한 권리를 행사하는 자로 정의된다.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만의 TSMC란 회사가 있다. 인텔, 삼성전자 등 설계와 생산을 모두 하는 종합반도체 회사(IDM)와는 달리, TSMC는 오직 생산만 담당하는 파운드리 업체다. 반도체 자체가 설계 도면이 없으면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철저히 고객사에 손을 벌려야 회사가 생존할 수 있는 구조다.



특히나 글로벌 반도체 업계 추세를 되짚어 보면, 시장은 그동안 IDM 업체가 이끌어 왔다. 자체 설계 및 생산이 가능하다보니, 애써 타 업체에 발주를 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위탁 생산을 맡긴다면, 대부분은 해당 업체의 비주력 반도체칩일 가능성이 컸다. '갑'인 IDM 업체로선 한 마디로 위탁 생산을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새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파운드리만을 고집해 온 TSMC가 기존 IDM 업체들이 생산하지 못하는 미세공정 반도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미세공정 반도체는 흔히 10나노미터 이하의 극자외선(EUV) 장비를 활용해 생산된 제품이다. 


반도체가 미세공정으로 설계되면 좋아지는 점은 뭘까. 업체 입장에선 생산효율성이 극대화된다. 하나의 원판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기존에는 50개의 반도체칩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미세공정에선 100~200개 생산이 가능하다. 대량 양산이 가능하다보니, 공급가도 저렴해진다. 여기에 미세공정으로 설계된 반도체일수록 전력소모 및 성능도 개선된다. 


기존 IDM 업체들은 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자체 생산보다 외주 생산을 맡기는 게 제품 경쟁력, 비용 절감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자체 생산 능력을 보유한 IDM 업체들도 TSMC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인텔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최근 분위기를 보면, TSMC는 더 이상 고객사의 수요가 감당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공장을 풀가동하고 있음에도, 여러 고객들이 반도체 설계 도면을 들고 줄을 길게 늘어선 상황이다. 이른바 슈퍼을의 탄생이다. TSMC가 슈퍼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미세공정 생산 체제를 조기 구축했다는 점에 있다. 작년에는 5나노 반도체 양산에 들어섰다. 내년부턴 3나노 공정 시대에 들어설 전망이다. 


이렇게 보면 슈퍼을이 되는 방법은 한가지로 귀결된다. 바로 '경쟁력'이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아 보인다. 아무리 갑과 을의 관계라 할지라도,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지닌 을은 갑으로부터 주도권을 가지기 쉽다. 


슈퍼을은 비단 반도체 업계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니다. 다양한 산업군에서 슈퍼을의 지위를 얻기 위해 업체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미래 기술의 융합체라 불리는 전기차 부문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배터리, 플랫폼 부문에서 이같은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더 이상 스마트폰, 가전, IT기기, 전기차 등 완성 제품을 만드는 갑이 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제 미래 산업의 패러다임은 경쟁력있는 서플라이어(공급자)가 주도하는 이른바 슈퍼을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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