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거래소 명줄 쥔 은행…국회 노력 '물거품'
자금세탁 평가 위험 기준 전무…FIU "은행 판단 존중해야"
이 기사는 2021년 02월 18일 14시 23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팍스넷뉴스 조아라 기자] 국내 시중 은행이 결국 가상자산 거래소(이하 거래소)의 명줄을 쥐게 됐다. 정부는 오랜 논의 끝에 은행이 자체 기준으로 실명확인 입출금 계정(이하 실명계좌)을 발급하도록 열어뒀다. 자금세탁위험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는 은행의 판단을 존중하는 한편, 거래 당사자의 책임을 강화한다는 취지다.


반면 업계는 규제 리스크를 떠안게 됐다. 오랫동안 국회를 통해 사업자 신고 기준을 명확히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이 같은 내용이 명시된 법률 제안 취지도 사실상 사문화됐다는 평가다.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이 배포한 '가상자산 신고 매뉴얼'의 최대 화두는 실명계좌 발급 기준이다. 몇 개의 거래소가 심사를 통과하느냐에 따라 가상자산 시장의 생태계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거래소의 생존이 곧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생존인 셈이다.



가상자산 사업자에게 자금세탁방지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의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금법)' 개정안에 따르면, 정부 심사를 통과하고 수리 통지를 받은 곳만 사업을 할 수 있다. 내달 25일 시행되는 개정안은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을 받고, 대표나 등기임원이 일정한 범죄 이력이 없는 사업자에 한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거래소 등 대통령령으로 정한 사업자에게는 일정한 조건을 갖춰 실명계좌를 발급받도록 했다.


지난 17일 FIU가 발표한 매뉴얼에 따르면 원화나 달러 등 법정화폐 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거래소는 오는 9월 24일까지 실명계좌를 받아야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 고팍스나 지닥, 플라이빗과 같은 거래소들이 이에 해당한다. 만약 기한까지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하면 사업을 접거나 원화 마켓을 닫아야 한다.


문제는 실명계좌 발급 기준이 명확치 않다는 데 있다. 그 중 핵심 요건인 '자금세탁방지 위험평가'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은행의 정성평가가 심사 결과를 좌우할 전망이다. 심사 과정에 정부의 입김이나 은행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는 우려다. 은행들도 이 같은 상황에 부담을 느끼고 정부에 위험평가 기준 마련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는 상황이다.


나머지 실명계좌 발급기준 요건인 ▲예치금과 고객자산 구분·관리 ▲금융관례법률 위반 및 신고 말소 4년 미경과 여부 확인 ▲ISMS 인증 등은 이미 법률 상 금융기관 확인의무 사항으로 명시돼 불필요한 요건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고객별 거래내역 분리·관리도 지난해 11월 시행령에서 언급된 항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상자산 사업자는 수리 여부를 가늠할 수 없어 사업을 계속할지 판단조차 쉽지 않은 형국이다. 예를 들어 거래소별 월간 일정 거래량 기준을 정하고 이에 따라 채용해야 할 자금세탁방지 인력 규모와 자격 요건을 명시하는 한편, 일정 수준 이상의 고객확인제도(KYC)와 의심거래보고(STR) 시스템을 갖추도록 구체화한다면 전반적인 사업성을 판단하고 그에 맞는 설비투자를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이 같은 논의가 개정안 발의 당시에도 꽤나 치열했다는 점이 주목할 대목이다. 당초 발의 개정안에는 실명계좌 발급 조건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국회가 실명계좌 발급 조건을 명시하면 법안을 통과시켜 주겠다고 정부에 제안하면서, 관련 내용을 시행령으로 위임하는 수준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FIU는 상위 국제기관인 자금세탁방지 금융대책기구(FATA)의 국가 심사를 앞두고 있어 법안 통과가 절실했다.


당시 국회가 금융위로 하여금 '실명계좌 기준과 조건을 시행령에 규정할 때 국회와 협의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법률안에 명시한 것을 보면 사안의 중대성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이같은 합의는 시행령과 고시가 제정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퇴색된 셈이다.


FIU는 계약 당사자인 은행의 자체 판단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거래소의 특금법 위반 사항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FIU 관계자는 "은행의 위험심사에 정성평가가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자금세탁 위험평가는 은행마다 중점적으로 보는 부분이 다르고 심사 경험도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준을 정해 이를 충족할 경우 실명계좌를 발급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자칫 은행으로하여금 리스크를 감당하라고 강요하는 결과가 될 수 있어 타당하지 않다"며 가상자산 사업자가 적극적으로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시중 은행 관계자는 "은행은 위험기반접근법(RBA) 처리 기준과 FATF 권고사항에 의거해 '신상품 및 서비스에 대한 자금세탁 위험'을 평가하게 될 것"이라며 "검사감독 중요성 원칙에 따라서 사회적 영향력이 큰 기업은 더욱 엄격히 평가할 예정이다. 거래소 등 VASP는 자금세탁 위험이 큰 곳으로 분류된다"고 말했다. 이어 "대부분의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자금세탁방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심사를 통과할 정도로 갖추면 된다고 판단해선 안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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