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럴해저드
잇따른 사모펀드 환매중단 사태를 이해하는 한 키워드
이 기사는 2021년 03월 22일 09시 34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팍스넷뉴스 양도웅 기자] 말을 하는 쪽과 말을 하지 않는 쪽이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판단을 내려야 한다.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나는 판단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 


그럼 한쪽은 말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판단(언행)을 위한 객관성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객관성은 사치이자 가상(imagination)이지 않을까. 즉, 일정 정도의 주관성과 그에 따른 편향성은 이런 상황에서라면 일단은 불가피하다. 어쨌든 인간으로선 존재해야 하니 말이다. 특히,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언론이라면 더더욱. 그럼 여기서 잠깐 A씨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ㄱ은행이 주거래은행도 아니었어요. 아내의 주거래은행이었죠. 아내가 추천하길래 가본 거였어요. 1년 6개월 뒤 목돈을 써야 하는데, 그 전까지 그 돈(9억원)을 단기 예금으로 묶어놓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ㄱ은행을 찾아 창구에서 이 말을 했더니, 갑자기 PB창구를 소개해주겠다는 거예요. 갔더니 커피 내주면서 좋은 단기상품 있다고, 요즘 누가 예금에 돈을 넣느냐고 하더라고요. 또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원금은 보장되는 상품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시작되는 스토리의 결말이 대부분 그렇듯, A씨가 가입한 상품은 사기였다. A씨가 받아든 상품설명서에 등장하지 않는 모 업체가 떡하니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기고 있었고, 우량 채권에 투자된다던 PB의 설명과 달리, 투자금은 모조리 부실채권에 투자됐다. ㄱ은행에서 해당 상품을 발굴한 직원은 상품 판매 완료 시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해외로 출국했다. 그리고 지금 그 돈들, 수많은 A씨가 낸 1000억원이 넘는 돈들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럼 이쯤에서 이 상품을 판 ㄱ은행의 말을 들어봐야 하는데, ㄱ은행은 유독 이 상황에서 말수가 적어진다. 끽해봤자 펀드를 만든 운용사를 탓할 뿐이다. 그럼 운용사는? "저희가 직접 투자한 게 아니라, 해외 자산운용사의 펀드에 투자하는 재간접펀드라, 저희도 지금 어떻게 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클리셰, 코로나19 핑계. "상황이 상황인지라 해외 실사도 쉽지가 않네요. 저희도 답답할 따름입니다."


자본주의는 탐욕이 아닌 신뢰로 굴러간다


피해자들의 언술은 늘 과장되기 마련이라는 속설까지 고려하면, 대체 이 제한된 상황에서 객관성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피해자들의 말을 '나노 단위'로 분해해 크로스 체크한 부분만 가려내 뽑는다고 하더라도 설명된 상품 자체가 이번처럼 사기라면, '모든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다'는 자본주의 최후의 보루를 검증 없이 믿으며 은행과 운용사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길 수 있을까. 그들의 잘못은 적다고, 배상의 책임도 사실상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물론, 판단을 유보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이쪽이 더 안전한 비평일 수 있다. 피해자들의 자본시장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그에 따른 아쉬운 선택들을 지적하는 주장들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개인투자자들이 직접 해외 자산운용사까지 실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인들을 포함해 투자자들이 금융회사를 믿지 못한다면,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는 굴러갈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탐욕이 아니라 신뢰로 굴어가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A씨는 현재 펀드에 투자한 9억원을 몽땅 잃고 여전히 전세 아파트에 살고 있다. A씨의 사정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걷어내도, 2019년부터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사모펀드 환매중단 사태는 은행과 증권사, 자산운용사들이 우리 사회가 인증한 신뢰라는 무기로 벌인 모럴해저드(moral hazard)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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