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는 왜 칼로 물도 안 벨까
허울 뿐인 무늬만 혁신…사외이사, 여전히 설 곳 없는 外人
이 기사는 2021년 06월 10일 08시 12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팍스넷뉴스 류세나 산업1부 차장] "어휴, 이걸 계속 같이 살아 말아!" 


지극히 개인적인 TMI(투 머치 인포메이션)다. 최근 부부싸움을 크게 한 판 했다. 투닥투닥 짜증 섞인 목소리로 오가던 대화는 고성으로 이어졌고, 여파는 여지없이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이튿날에도 갑론을박은 계속됐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치열한 수싸움과 릴레이 교전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꽉 막힌 벽창호랑 이야기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후, 오늘도 내가 참는다."



결과론적으론 매우 가까스로 접점을 찾았다. 서로 간 지켜야 할 규칙이 하나 더 생겼다. 오랜 설전에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유사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옳고-그름' 혹은 '최선-차선'을 판단할 수 있는 자체 기준을 세웠다는 것에 왠지 모를 뿌듯함도 들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 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기업들 이사회는 왜 계속 조용해? 나만 치고받는 거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며, 근데 어떻게 여전히 만장일치인건데?!"


국내 주요기업들은 최근 몇 년 새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앞다퉈 분리해왔다. 개편 목적은 경영 투명성과 건전성을 제고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존엔 '대표이사=의장' 구조가 공식처럼 여겨져 왔는데, 시대적 흐름이 권한이 어느 한 곳으로 집중되는 형태를 지양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기업들도 이런 변화에 동참한 것이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경영에 집중하고, 이사회는 경영진이 회사와 주주 이익을 위해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관리·감독하는 본연의 역할에 보다 충실할 수 있는 이상적 환경이 마련되는 듯 했다. 


내심 이사회에 올라오는 안건들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외이사들이 이사회 안건을 숙지하기에 말도 안 되게 빠듯한 '24시간 전 통보' 조항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기업들 정관부터 고쳐질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경영진과 사외이사진간 보이지 않는 알력싸움도 기대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까, 기대했던 미래는 상상에 그쳤다. 새 부대는 준비했지만, 새 술은 아니었다. CEO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했지만, 둘의 속성은 다르지 않았다. 의장을 사측 인사인 기타비상무이사가 꿰차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오너 본인이 직접 의장을 맡는 경우도 있다. 이사회 독립성을 강조했으나 실질적 독립은 아니었던 셈이다. 


삼성전자만 해도 2018년부터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했지만 의장직을 사외이사에 내준 건 준법경영 홍역을 치른 작년부터였다. 재계 모범생으로 통하는 LG 또한 권영수 LG 부회장이 기타비상무이사로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유플러스, LG화학 등 주요 계열사 4곳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오너 부부의 배임·횡령으로 시끄러웠던 삼양식품 또한 3월 주주총회에서 준법경영 확립을 강조하며 대표이사와 의장 분리를 선언했으나, 사내이사 중 한 명을 의장으로 세웠다. 구본걸 LF 회장은 최근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면서도 이사회 의장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사회 운영을 통해 기대하는 건전한 끝장토론이 부재하고, 지속가능한 성장 토대 마련을 위한 속도가 더뎌지는 이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실제 연간 이사회에 올라오는 수천여 안건의 대부분은 여전히 원안 그대로 무사통과되고 있다. 지난해 열린 대기업집단 내 이사회 가운데 부결된 안건은 LG전자 1건, SK㈜ 1건 정도만 눈에 띈다. 


올 들어선 그나마 나아진 편일까. 4월까지 열린 주요기업 이사회 목록에서 보류 1건(삼성바이오로직스-보류 후 재상정, 최종 가결), 부결 2건(KT&G, 교보증권)이 확인된다. 이쯤 되면 고작 물밖에 못 베어도 할 말 하고 사는 부부간 고성방가가 나은 건 아닌가.


글로벌 시장에서 요구하는 이사회 모범규준은 CEO로부터 독립적인 사외이사가 의장직을 맡아 경영진을 세밀히 견제하고 주주가치를 우선 삼는 것이다. CEO와 의장 모두가 내부자라면 과거와 다른 게 도대체 뭔가. 구조가 바뀌지 않았는데 ESG위원회를 신설한다고 또 뭐가 달라질까. 


올해 A기업 사외이사로 선임된 인사가 최근 통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외이사 따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 역시 문제 소지가 있어 보이는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제발 할 말하고 살아 달라. 목소리를 키워 달라. 평소엔 신랄한 비판도 마다 않던 당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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