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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파친코' 실존인물, '파친코의 왕' 한창우
이현서, 박수혁 기자
2022.05.12 08:00:22
일본 파친코 1위 기업 마루한 그룹 한창우 회장의 성공 스토리
이 기사는 2022년 05월 11일 16시 02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드라마 파친코의 실존인물! 일본 파친코 왕 마루한 한창우 회장. 시장 규모 연간 200조원! 한 해 이용자 수, 도쿄 디즈니랜드 이용객(2500만명)의 3.6배, 9000만명! 일본에서 소바점, 편의점보다 많다는 이 것! 일본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파친코입니다. 이 파친코를 이끈 1등 기업이 재일한국인 기업이라는 사실 아시나요? 에딧머니는 이번엔 애플TV 화제작 '파친코'의 실제 모티프인 일본 파친코의 왕, 에딧머니는 마루한 그룹 한창우 회장의 스토리를 담아보았습니다.


[팍스넷뉴스 이현서, 박수혁 기자] 한창우의 유년시절

1930년 5남매 중 셋째로 경남 사천군 삼천포 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유년기를 돼지사료를 배급받아 겨우 연명할 정도로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소학교 6년 내내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수재였지만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엔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소학교 졸업 후 정미소에서 일을 하다 읍장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읍장이 좌익인사란 이유로 남로당 하부지도자로 몰리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열여섯 소년은 쌀 두되와 영어사전만 들고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싣습니다.


왜 파친코였는가?

일본에서도 고단한 삶은 계속됐습니다. 먼저 징용으로 끌려간 형과 함께 벽돌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극심한 민족 차별에 시달렸습니다. 한창우는 그러나 미래를 위해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계속했고, 일본에 간 지 3년 만에 독학으로 도쿄 호세이대 경제학과에 합격했습니다.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된 명문대였지만 한국인인 한창우를 받아주는 일본 회사는 없었습니다. 한창우는 차별의 높은 벽을 깨닫고 교토 미네야마에서 작은 파친코 가게를 운영하는 매형을 찾아갔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형의 파친코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또다시 위기가 닥쳤습니다. 코앞에 세 배 큰 경쟁가게가 들어서면서 가게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매형은 고국행을 선택했고, 한창우는 파친코장을 이어 받기로 결정하고 파친코 사업에 나섰습니다. 한창우와 파친코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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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장이 주식회사가 되기까지

주인이 바뀌자 파친코 장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가게를 새로 하니 승률조작이 없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한 회장은 승률조작을 하지 않았고 도리어 돈을 많이 잃은 사람에게는 구슬을 더 주는 등 이익을 최소로 가져가는 박리다매 전략을 썼습니다. 그의 전략은 통했고, 기계 20대는 금세 40대로 늘었습니다.


파친코 장사가 잘돼 2,3호점을 낼 법도 한데 그는 음악다방을 열었습니다. 파친코장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살아남을 전략으로 한창우는 '클래식함'을 꼽았고, 명문대 출신에 클래식 애호가라는 자신의 강점을 살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고급 음악다방을 오픈했습니다. 다방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등불'이란 뜻의 '루체.' 클래식이 하루 종일 나오고 커피 한 잔 가격이 우동 세 그릇 값으로 비싸 시골마을에선 망할 것이다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예상과 달리 루체는 큰 성공을 거뒀어요.


한창우는 대학시절부터 클래식과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가난했지만 높은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안목은 루체만의 '분위기'가 됐고, 소비자의 '욕망'과 루체의 고급스러움이 맞아떨어지면서 핫플레이스로 등극한 것입니다. 타이밍도 좋았습니다. 일본 경제가 전후 회복기에 접어들어 소비가 살아나던 때였습니다.


파친코장도 루체에 이어 중국음식점, 파친코 2호점, 3호점 계속해서 가게를 늘려갔습니다. 1972년엔 주식회사까지 세웠고요. 그의 일본어 성 '니시하라'를 딴 니시하라 상교 주식회사입니다.


부도 위기

하지만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부도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볼링붐이 일었는데, 한창우도 '볼링왕'이 되겠다며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볼링장을 오픈했습니다. 그런데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볼링장에 발길이 끊긴 것입니다. 건설비만 27억엔이 들어간 볼링장의 연간 매출은 1000만엔도 되지 않았고 결국 한창우는 60억엔의 천문학적인 빚을 지고 부도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60억엔은 지금 돈으로는 1조4000여 억원. 평생을 갚고도 못 갚을 금액으로 부도를 내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선택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곱이나 되는 자녀들과 수많은 보증인들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빚을 빚으로 막고 사채까지 손을 댔습니다. 막바지에 이른 그는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은행들을 찾아다니며 사정을 솔직하게 토로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창우의 신용을 믿고 30억엔을 빌려줬던 오사카 H상호은행이 1억엔을 빌려줬습니다. 한창우는 급한 불을 끄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에 '올인'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루한의 탄생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파친코'였습니다. 1973년 '마음을 새롭게 해 빚을 갚자'는 취지로 '마루한'이란 상호로 회사이름을 바꿨습니다. 마루는 '둥글다'란 뜻의 일본어, '한'은 그의 한국 성이었습니다. '나를 낳아준 한국과, 나를 성장시켜준 일본 모두 존중하겠다'는 뜻이 담긴 이름입니다. 새 브랜드로 무장한 한창우는 1973년부터 77년까지 5년 동안 미네야마, 카시와라, 시즈오카에 파친코점을 재 오픈한 데 이어 교토부 노다가와, 효고현의 히메지, 고베, 오스키, 아까시 등지로 점포를 확충했고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뒀습니다. 일본 2대 도시인 오사카에 파친코점을 열었고 볼링장, 쇼핑센터, 음식점도 개장해 성공시켰습니다. 한창우는 일본에는 도입되지 않은 교외형 파친코로 차별화했는데, 이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때마침 일본 경기 회복과 함께 파친코 붐이 일었고 10년 만에 60억엔의 원금 뿐 아니라 이자까지도 모두 갚고 말았습니다.


1995년 도쿄에 7층짜리 일본 최대 규모의 파친코장을 여는 등 그의 사업은 탄탄대로를 걸었고 2002년 2월에는 파친코 100호점 돌파, 2005년 매출 1조엔을 돌파하면서 파죽지세의 성장을 보였습니다. '뉴욕타임즈'등 외신들도 앞 다퉈 그의 행보를 보도하며 한창우는 '파친코의 왕', '파친코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 갔습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코로나 직격타로 매출은 줄었지만 연매출 10조 이상으로 여전히 세계 최대 파친코 기업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골프장 레저사업, 외식사업, 금융사업, 부동산 등 사업 영역도 크게 넓혔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마카오 등 동남아로도 진출,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입니다.


마루한의 성공비결, '마루하니즘'

마루한의 성공비결은 그의 경영철학 '마루하니즘'에 있습니다.

한창우는 '실력'과 '정신'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공통의 정신을 마루하니즘이라 일컫는데요. 봉사, 희생, 창의성, 주인의식, 도전정신, 신분상승과 부의 장려입니다. 그는 도쿄 인근에 '마루한 비즈니스스쿨'을 세웠고, 매년 전국 7300여 직원들이 이 곳 에서 마루하니즘을 배웁니다. 노사 관계를 가족으로 승화시키고, 조직원간 균열을 막는 데 주안점을 뒀습니다.


평생을 차별 속에 살아온 한창우는 마루한을 '차별 없는 조직'으로 만들었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일 년 만에 점장을 다는 일이 가능한 곳이 마루한입니다. 기업실적을 전부 공개하는 등 투명경영에 힘쓸뿐더러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야쿠자와의 연루되지 않기 위해 야쿠자 전직 간부들을 채용하는 등도 파친코 기업으로는 특이할 점입니다.


깊은 슬픔, 사고로 잃은 큰 아들

부와 명예를 모두 가졌지만 가슴 한켠에는 큰 아픔과 상처를 갖고 있는 한창우. 큰 아들을 사고로 잃어버리는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신을 유독 닮았던 장남 한 철. 고교시절 야구선수로 활동하던 아들은 아버지처럼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아이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런 아들이 고등학생 때 미국연수 중 요세미티에 갔다가 그만 강에서 실족사하는 사고를 당한 거였어요. 한 회장은 두 달 내내 회사를 나가지 않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큰 아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 초등학생 시절 일기장에서 '나는 우리 고장에 야구장을 세우는 꿈을 갖고 있다'는 문구를 보고, 꿈을 이뤄주기로 하고 미네야마시에 야구장 건립비로 1억 엔을 기부했던 한창우. 아들의 꿈은 그렇게 사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그의 교토 자택에 들어서면 장남 한철의 초대형 초상화가 걸려있고, 시간이 날 때마다 향을 피우고 아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또 큰 아들의 방은 작은 소지품까지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고 합니다.


기부왕 한창우

보통 부자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는데 한창우는 달랐습니다. 재벌회장이지만 소탈한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고 허물없이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베푸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에게 붙는 수식어가 '기부왕'입니다. 한창우는 해마다 회사 수익의 2%는 일본 지역사회를 위해 쓰고, 재난 등의 피해를 입은 지역에 아낌없이 기부해왔습니다. 일본 정부는 그런 그에게 명예시민증과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고국에서도 그는 기부왕으로 훈장을 수여받았고, 한일 양국에서 훈장을 받은 한국인은 이희건 산업은행 창립자와 그 뿐이라고 합니다.


'파친코 왕'의 꿈, 고국에 전재산 환원

한창우의 꿈은 고국에 전 재산을 환원하는 일입니다.

올해 91세. 앞서 전 재산을 고국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해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간 일본과 동남아에만 투자해오던 그가 인천 영종도에 여의도만한 크기의 복합레저시설 '한상드림아일랜드'를 세우는 것도 꿈의 연장선상입니다. 2024 완공 예정인 이 사업은 한창우 회장이 일본국적자로 일본 자본이라는 논란도 많은 사업입니다. 경남 사천에서도 한 회장에게 투자 요청을 한 상태로 한국 지역사회 투자가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한상' 네트워크를 만들어 성공한 한인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전 세계 디아스포라 운동에도 힘쓰고 있는 한 회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눈은 세계로, 가슴은 조국으로."


이상 드라마 파친코의 실제 모티프가 된 인물 마루한 그룹 한창우 회장의 인생 스토리를 살펴봤습니다. 앞으로 한창우 회장이 고국에서 어떤 사업을 펼쳐갈지, 그의 꿈이 어떻게 실현될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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