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건우 기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통적인 갑을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기업(사용자)과 노동자의 대립관계일 것이다. 다만 이 관계의 비대칭성은 자본주의의 유구한 역사적 흐름을 거치며 상당히 완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금융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금조달' 영역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갑을관계가 있다. 물주에 해당하는 재무적투자자(FI)와 자금이 필요한 기업 간의 관계다.

과거 '자본가'와 '사업가'라는 말이 거의 동일한 의미로 해석되던 시절과는 다르게, 현대에는 돈을 대는 물주와 돈을 버는 기업의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윤 창출'로 규정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사실상 기업의 역할을 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풀어낸 셈이다.

문제는 FI와 기업 간 자금조달 과정에서의 갑을관계가 소액주주 등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벤처기업이나 코스닥 상장기업처럼 신용등급이 낮아 일반적인 회사채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는 경우 이러한 양상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들 중소중견 기업들은 FI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들을 제시함으로써 울며겨자먹기식 자금조달을 강행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시로 RCPS(상환전환우선주)나 전환사채(CB)가 있다. 고배당 혹은 안정적 채권수익에 전환권을 묶어서 파는 경우다. 기본적인 상환권을 바탕으로 원금은 보장되고, 이자수익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기업가치가 오를 경우 주식으로 전환해 차익실현까지 노릴 수 있다. 심지어 주가가 하락해 전환권 행사의 메리트가 없어질 경우 초기계약에서 정한 '전환가액'을 하향조정해 FI가 더 많은 주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리픽싱' 조항까지도 존재한다. 최소한 '로우 리스크(Low Risk), 로우 리턴(Low Return)'이고 운이 좋으면 '하이 리턴(High Return)'이다.

반면 기업의 경우 여러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전환권이 행사될 경우 발행주식총수가 늘어 기존 주식가치가 희석된다. 리픽싱이 발생하면 발행주식수는 더욱 증대된다. 또한 FI 측이 차익실현을 노려 전환물량을 매도할 경우 주가가 하락할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CB 계약 과정에서 기업의 콜옵션(매도청구권)이 배제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는 기업들이 적절한 상환을 통해 주가를 관리하기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결국 기존 주주들의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는 셈이다.

업계에서는 CB 계약에서의 콜옵션과 함께 '상향 리픽싱' 등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상향 리픽싱의 경우 기업의 주가가 급등했을 경우 FI측의 전환물량을 축소해 과도한 차익실현을 막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잠재적 매도물량이 급증하는 것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을 거란 분석이다.

다만 이러한 방안들도 FI가 온전히 갑의 입장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실행되기는 어렵다. 근본적으로 물주와 기업, 그리고 기존 주주들을 포함해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관계가 총체적으로 변화돼야 실행 가능하다.

방임의 결과로 불공정한 경쟁환경이 편성된다면 개입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프리드먼식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과 함께, 기업의 역할을 물주만이 아닌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한 이익'으로 규정하는 시대가 도래한 만큼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맞출 '공정'의 역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