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롯데그룹, 언제까지 수요예측 외면할 것인가
노골적· 반복적 장기CP 조달…"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시장성 조달엔 소극적"
이 기사는 2022년 05월 18일 10시 51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딜사이트 백승룡 기자] "가격결정의 투명성을 확보해 회사채 시장의 기업정보 다양화와 신뢰성을 증대시키겠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2012년 회사채 시장에 수요예측(사전청약) 절차를 의무화하며 강조한 내용이다. 당시 회사채 시장은 발행사 우위의 시장구조가 형성돼 있었다. 기업은 수요예측 없이 증권사를 통해 기관투자가의 희망 금리·물량을 파악해 가장 유리한 조건을 결정했고, 증권사는 기업이 요구하는 금리에 맞추기 위해 낮은 금리로 인수한 뒤 높은 금리로 투자자에 판매하는 '수수료 녹이기' 관행도 만연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수요예측을 도입한 이후 10년이 흐르면서 우리나라의 회사채 시장도 가격결정의 투명성이 높아졌다는 평을 받는다. 수요예측이라는 공개 시장에서 발행사와 투자자 사이에 공정한 금리가 도출되고, 이를 토대로 수많은 데이터가 쌓여 또다시 합리적인 발행금리 산정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작동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같은 회사채 시장의 선순환 구조를 교란시킨다는 눈총을 받는 기업이 있다. 롯데그룹이다.


롯데그룹 주력 계열사인 롯데케미칼(AA+/안정적) 정도만 주기적으로 공모채 시장을 찾을 뿐, 나머지 계열사들은 장기 기업어음(CP) 등으로 자금조달을 우회하는 모습을 수 년간 반복적으로 보이고 있다. 최근 금리인상으로 회사채 시장이 위축되면서 기업들이 공모채 대신 장기CP로 향하는 상황에서도 롯데는 두드러졌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 초부터 지난달까지 장기CP를 발행한 일반 기업은 총 9곳으로 이 중 5곳이 ▲롯데지주 ▲롯데하이마트 ▲롯데알미늄 ▲롯데렌탈 ▲롯데글로벌로지스 등 롯데였다.


이 기간 전체 장기CP 발행액(8400억원) 가운데 이들 롯데그룹(5600억원)의 비중도 3분의 2 에 달했다.


장기CP는 자본시장에서 일종의 '혼종'이다. CP·단기사채 등 1년 미만의 단기물 마련을 위해 조성된 단기 금융시장 취지와는 달리 1년 이상의 만기를 띈다. 만기가 길어 회사채와 유사한 실익을 누릴 수 있지만 수요예측은 거치지 않는다. 증권신고서 제출 자체는 의무화되어 있지만 보호예수 1년 등 전매제한 조치를 취하면 증권신고서 제출도 생략할 수 있다. 장기CP가 자본시장법의 사각지대이자, 장·단기 금융시장을 왜곡하는 주범이라고 비판을 받는 배경이다.


물론 장기CP 발행 자체는 법적으로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롯데그룹이 이를 활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현재와 같은 금리 인상기에는 자금조달 비용을 낮출 수 있는 창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롯데그룹은 자금조달의 규모도 큰 데다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수요예측 기반 회사채 시스템을 노골적이고 반복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지난 2020년에도 롯데그룹은 ▲롯데쇼핑 ▲롯데하이마트 ▲롯데하이마트 ▲롯데글로벌로지스 ▲부산롯데호텔 ▲롯데알미늄 ▲롯데GRS 등을 앞세워 한 해 2조원에 육박하는 장기CP를 발행하기도 했다.


'회색지대'도 적당히 발을 담가야 잡음이 덜 할텐데, 아예 그룹 전체가 회색지대로 돌격하는 모양새다. 국내 재계 5위라는 위상을 고려하면 다소 아쉬운 행보다.


롯데그룹이 이처럼 지속적으로 공모시장을 외면하는 것은 크레딧 리스크가 커지자 민평금리를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자칫 공모시장에 나섰다가 미매각이 발생하거나 발행금리가 높아지면 기업의 이미지 훼손은 물론, 추후 자금조달 비용까지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롯데지주만 보더라도 지난달 말 기준 개별민평금리는 2년물 3.442%, 2.5년물 3.638%, 3년물 3.707%로 AA0등급민평(2년물 3.279%, 2.5년물 3.471%, 3년물 3.531%) 대비 16~18bp 가량 높게 형성돼 있었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흔히 수요예측 흥행에 확신이 없으면 사모, CP 등으로 자금조달을 우회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다"며 "롯데그룹은 기업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시장성 조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고 말했다.


수요예측 제도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 회사채 시장의 가격 투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해 왔다. 수요예측을 진행하지 않는 장기CP도 분명 기업금융의 다양성을 높이고, 발행사의 편의성을 높이는 순기능을 갖는다. 다만 롯데 규모의 그룹이 반복해서 시장의 발행금리나 유통금리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교하게 짜인 시장에 공백을 키우는 것과 같다. 시장교란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같은 상황이 누적되면 외국 투자자들이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회사채 금리에 대한 신뢰도 훼손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롯데는 언제까지 수요예측을 외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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