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횡재 리스크
횡재세 부과 하나의 시그널 될 수도…기업 투자·경영활동 위축 우려
이 기사는 2022년 08월 24일 08시 31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딜사이트 백승룡 기자] 때는 올해 초. 정유사 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국제유가가 화두로 올랐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전례없는 불황을 겪던 정유업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극적인 실적 턴어라운드를 맞이하게 된 것을 덕담으로 건냈다. 지인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정유사들은 실적이 좋아지면 적폐로 몰린다. 자칫하면 두더지게임처럼 얻어맞는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당시엔 웃어 넘겼다.


놀랍게도 정유사 직원의 기우는 불과 반 년 만에 현실로 다가왔다. 이달 초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한국판 횡재세' 도입 추진 계획을 밝힌 데 이어 지난 18일에는 이성만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횡재세'를 골자로 하는 법인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정부가 유류세를 인하했을 때 정유업체, LPG업체들이 직전 3개년 평균 소득 대비 5억원 이상의 초과소득이 발생했다면 초과소득의 20%를 법인세로 부과하겠다는 내용이다.


횡재세(windfall tax)는 1997년 영국이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당시 공기업들이 민영화 과정에서 얻은 시세차익을 정부가 환수하는 차원에서 시행됐다. 올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자 영국은 지난 5월 셸·BP 등 호황을 누린 석유·가스 기업을 대상으로 25%의 '횡제세(초과 이윤세)'를 부활시켰다. 현재 미국도 이익률이 10%를 넘어선 석유 기업에 추가로 21%의 세금을 부과하는 과세 법안을 추진 중이다. 이제 횡재세는 바다를 건너 국내를 맴돌고 있다.


다만 해외의 횡재세를 국내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영국 등 유럽에서 초과이윤세 부과 대상은 원유를 시추하고 생산하는 '업스트림(upstream)' 업체들이다. 원유 시추 비용은 동일한데 유가가 상승하면 판매가격이 높아지면서 이윤이 크게 늘어난다. 반면 국내 정유사들은 해외에서 원유를 수입해서 석유제품으로 정제하는 사업구조다보니 운송비 등에서 유가 상승에 따른 비용도 함께 늘어난다.


시장 논리에도 맞지 않다. 정유산업은 본래부터 국제유가, 환율 등 외생변수에 울고 웃는 업종이다보니 호황기에 돈을 벌어 불황기를 감내한다. 호황기 이윤에 제동을 걸려면 불황기 적자에 대해서도 보전해주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러나 지난 2020년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정유4사가 연간 5조원 규모의 영업손실을 기록할 때도 정부의 지원은 전무했다. 등가교환이 성립하지 않는다. 정유사가 벌어들이는 수익 가운데 내수 보다 수출 비중이 더 높다는 점도 횡재세의 논리적 결함을 드러낸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영국의 횡재세 여파로 석유 메이저 BP는 180억파운드(약 28조5000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그간 휘발유 등 석유제품 접근성이 높았던 것이 정유사들의 끊임없는 투자를 통한 '규모의 경제' 과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유사 투자 위축으로 생산량이 줄고 가격이 올라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소비자다.


더군다나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S-OIL), 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4사 중 2곳(SK이노베이션·S-OIL)은 상장 기업이다. 소액주주의 지분 비중도 SK이노베이션은 35.28%, S-OIL은 34.69%다. 오름세를 거듭하던 이들 기업의 주가는 공교롭게도 정치권에서 횡재세가 언급된 6월 중하순부터 한동안 하락세로 돌아선 바 있다. 물론 주가의 오르내림이 횡재세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기업을 향한 정치인들의 사려깊지 않은 언행은 언제나 투자자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서두에 언급한 정유사 지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오늘은 정유업계가 타깃이 되었지만 내일은 어느 업계가 타깃이 될지 알 수 없다"며 "이번 횡재세 논란은 급격한 이윤증가가 오히려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시그널'이 되어 기업의 투자와 경영활동을 제약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유업계 수익성의 척도가 되는 정제마진 월별 추이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

관련종목
관련기사
기자수첩 817건의 기사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