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콜옵션 미행사 번복으로 신뢰 깨진 흥국생명···신평사도 신용도 조정 나서
이 기사는 2022년 11월 18일 08시 44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흥국생명 빌딩


[딜사이트 한보라 기자]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시장이 차갑게 얼어붙었을 때 한 취재원이 던진 우스갯소리가 있다. 오늘의 시장과 내일의 시장이 달라 쉽게 취재에 응하기 어렵다는 뼈가 숨은 농담이었다. 그의 농담은 마치 예언(?)처럼 흥국생명 발(發) 신종자본증권(영구채) 조기상환권(콜옵션) 미행사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안 그래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채권시장에 큰 돌이 던져진 격이었다. 이후 한국 정부가 발행하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5년물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지난 2017년 이후 사상 최고치로 뛰었다.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미행사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뭘까. 지난달 31일 흥국생명 경영진은 이사회를 열고 이달 9일로 예정됐던 5억 달러 규모의 외화 영구채 콜옵션 행사를 포기했다. 그날 이사회 의사록에는 '금리가 높은 현재 시장 상황을 고려했을 때 차환 발행을 하지 않는 게 경영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한 줄짜리 짤막한 이유가 적혔다.


세부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해볼 수 있다. 우선 보험업 감독 규정상 보험사가 자본성 증권 콜옵션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해당 채권을 상환하고 난 뒤에도 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RBC)비율이 금융감독원 권고치(150%)를 상회해야 한다. 6월 말 기준 흥국생명의 RBC비율은 157.8%로 선제적 자본 확충에 어려움이 있었을 수 있다. 의사록에 적혀있듯이 금리상승에 따라 가중된 이자 비용도 한몫했다. 흥국생명이 발행한 외화 영구채의 금리는 연 4.475%. 콜옵션 미행사로 스텝업이 적용되면 표면금리는 연 6.742%까지 높아질 예정이었다. 차환할 경우 부담해야 하는 금리는 연 1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됐던 만큼 차라리 미행사에 따른 패널티(스텝업)를 감수하는 게 이득이 된다는 판단이 뒤따른 셈이다.


미행사로 인한 여파가 일파만파 퍼지자 흥국생명은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고 콜옵션 행사로 입장을 선회했다. 채권에 부여된 권리(콜옵션)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게 채무불이행(디폴트) 문제가 될 수 없다던 금융당국도 슬며시 발을 뺐다. 금융당국은 콜옵션을 이행하기 위한 RBC비율 감독규정을 일부 완화해줬고 흥국생명의 모회사인 태광그룹은 채권 상환을 위한 출자를 약속했다.


이번 계기로 일부 신용평가사까지 흥국생명의 신용등급 재평가에 나섰다. 콜옵션 행사 번복으로 채권시장 접근성이 떨어진 데다가 차환 없는 상환을 결정한 만큼 향후 자본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원론적으로 따지면 흥국생명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금융당국의 앞선 변명처럼 콜옵션은 채권에 '붙는' 권리다. 행사 여부는 발행사가 결정할 일인데 여기저기서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걸고넘어지니 괜히 속이 쓰리다. 여기에 내년 10억 달러 규모의 외화 영구채의 콜옵션 만기가 도래하는 한화생명도 차환 없는 상환을 결정했는데 어떤 신평사에서도 신용도 조정을 고려하겠다는 말이 없다.


이번 사태로 인해 금융업권의 본질은 신뢰라는 명제가 더욱 공고해졌다. 그간 국내에서 발행하는 영구채는 외국과 달리 만기 30년을 채우지 않고 5년 뒤 콜옵션을 행사한다는 게 암묵적인 약속(관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더 높은 금리를 받아야지 누가 그 금리에 한국물(KP) 영구채를 매수하겠냐는 게 투자자들의 기저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다. '빌려준 돈을 언제, 어떻게 받을 수 있다'는 건 금융업을 받쳐주는 가장 본질적인 믿음이다. 흥국생명을 위해 변명해주기엔 우리는 이미 레고랜드 사태로 '시장을 지탱하는 건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이라는 교훈을 얻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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