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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에 대한 시장의 '조급증'
과도한 '경영 비전' 발표 요구, 삼성 발전에 도움 안돼
이 기사는 2023년 10월 27일 08시 43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삼성물산 합병 관련 재판에 출석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출처=삼성전자)


[딜사이트 정호창 부국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공식적인 삼성그룹 총수 취임 1주년을 맞았다. 부친인 고(故) 이건희 회장을 떠나보낸 지는 3년이 됐다.


지난 1년 삼성그룹은 꽤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가 주력인 반도체 사업에서 수조 원대 적자를 기록하며 불황의 늪에 빠진 상태며, 다른 계열사들도 성장 정체를 겪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를 강타한 고금리 기조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따른 물가 인상이 글로벌 경기 침체와 소비 부진으로 이어져 삼성을 괴롭히고 있다.


삼성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이런 상황을 크게 우려하는 분위기다. 특히 글로벌 1위를 지켜온 삼성전자가 고대역폭 메모리(HBM), 프리미엄 스마트폰과 가전, 파운드리 부문 등에서 경쟁자들에게 잇따라 뒤쳐지고 있다는 점이 그룹 안팎으로 위기 의식을 키우고 있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이 부친의 '신경영'과 같은 메시지를 하루빨리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각에선 조언의 수준을 넘어 '왜 빨리 비전과 철학을 발표하지 않느냐'는 질책마저 나온다.


특히 올해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로 대변되는 '신경영' 선언의 30주년이 되다 보니, 그 뒤를 이을 이 회장의 메시지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더없이 높은 상태다.


하지만 삼성그룹과 같은 거대 기업의 방향을 결정할 철학과 비전을 단 1년 만에 내놓기는 쉽지 않다. 각 사업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미래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 등을 거쳐야 하는 만큼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건희 회장도 총수에 오른 후 5년 반이 지나서야 '신경영'을 선언할 수 있었다. 후쿠다 다미오 삼성전자 고문이 3년 간 내부를 진단하고 올린 보고서가 배경이 됐다.


이 회장은 선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총수 자리에 올랐다. 부친의 급작스런 와병으로 예상보다 이른 승계가 이뤄졌고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삼성그룹 총수로는 처음으로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삼성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왔던 미래전략실도 해체됐다. 선대와 달리 수준 높은 참모 조직의 보좌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무엇보다 그를 향한 사법 리스크가 여전한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 연루된 사건은 형사 처벌과 사면으로 일단락됐으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된 기소는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룹의 새 비전과 경영 철학을 발표하기는 쉽지 않다. 사법 리스크가 다시 현실화될 경우 메시지에 담긴 권위와 동력을 단번에 잃을 수 있다.


이 회장에게 시간이 더 필요한 이유다. 충분한 준비와 검토를 마치고, 권위와 명예를 온전히 회복한 후 비전을 발표해야 그룹의 말단까지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대계(大計)를 세우는 이는 조급함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더뎌 보여도 때로는 '우보천리(牛步千里)'가 가장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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