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에서]
노병은 사라질 뿐이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오너···기억은 하고 있자
이 기사는 2024년 02월 07일 08시 38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출처=픽사베이)


[딜사이트 최홍기 기자]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오랜 기간 탈도 많았으나 동시에 숭고하기까지 했던 나름대로 헌신적이기까지 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별은 한순간이었다. 붙잡고도 싶었다. 아니, 붙잡았다. 추해져도 상관없다 싶었다. 그간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면 그깟 자존심은 사치였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 예년의 객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병'의 마지막 미련이었달까. 다만 거기까지였다. 끝내 뒤돌아 걷는 노구의 모습을 쳐다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양유업의 홍원식 회장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수십년간 지켜왔던 남양유업을 한앤컴퍼니에 넘기게 되면서다. 2021년 홍원식 회장이 돌연 경영권 양도 계약 무효화를 주장하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지 약 3년여만이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홍 회장 입장에서는 잊고 싶은 치욕의 기간이었을 테다. 시작은 어찌보면 과도한 자긍심의 발로였다. 2021년 자사의 불가리스 제품이 '코로나19'를 억제할 수 있다고 발표하면서 여론의 거센 질타를 받았다. 급기야 홍 회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언론에 직접 사퇴 및 경영권세습을 하지 않겠다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해당 불가리스 사태가 기업 존폐까지 논할 수준으로 번진 데 따라 이를 직접 수습하고자 한 셈이다.


그러나 그의 첫 기자회견만으로는 악화된 분위기를 수습하기 버거웠다. 오너일가 지분만 전체의 절반이상을 소유한 상황에서 단순 회장직 사퇴만으로는 성난 여론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이는 결국 홍 회장으로 하여금 한앤코에 경영권을 매각하게 되는 단초가 됐다.


그의 경영권 매각은 세간의 평가와 별개로 신선한 충격을 줬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던 탓이다. 홍 회장 또한 한앤코와의 경영권 매각 건과 관련해 사내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메일에서 "사태 해결을 위한 책임감으로 회장직에서 내려왔고, 자식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경영쇄신안을 발표했음에도, 회사 안팎의 따가운 시선은 피할 수 없었다"며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는 고심 끝에 저의 마지막 자존심인 최대주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수십년간 이끌어온 기업과 이별을 하자니 본전부터 생각났던 것일까. 적어도 자식들이 먹고 살 길은 만들어주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계약 위반이라는 이유로 외로운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앤코가 계약과정에서 '오너일가에 대한 예우' 등 약속한 사안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계약상 명분은 없었다. 여론 또한 홍 회장을 등졌다. 기업을 수십년간 이끌어왔지만 일말의 동정도 사치였던 모양이다. 설상가상 법원에서도 끝내 한앤코의 손을 들면서 더 이상의 고집을 부리기도 어려워졌다.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겠냐만 문득 수년이 지난 홍 회장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이 뇌리를 스친다. 당시 홍 회장은 언론앞에서 1~2분 남짓의 눈물섞인 통한의 입장문을 발표하고 별다른 질의응답 없이 휑하니 사라졌다.


오해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단언컨대 1950년생인 홍 회장은 죽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랬듯 홀연히 사라지고 있을 뿐이다. 그 자체가 멋스러운 과정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국내 대표 유(乳)기업중 하나인 남양유업을 이끌어온 만큼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봐주는 게 마지막 예우이지 않을까. 잊혀지는 것만큼 씁쓸한 것은 없을 테니까.


지난 2021년 남양유업 본사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들어서는 홍원식 회장. (사진=최홍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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