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에서]
자율이라 쓰고 반강제로 읽는다
지배구조 모범관행 발표 3개월만에 은행권 이사회 '대변혁'
이 기사는 2024년 03월 18일 11시 30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제공=각 사


[딜사이트 이성희 차장] 1990년말 2000년 초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세대로서 '자율'이란 말에 담긴 반강제적 '타율'의 함의를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다. 반 정원의 100%가 참석하는 '자율'이 가능했고, 이는 자율적으로 불참 시 체벌 등의 방식으로 불이익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금융감독원이 마련한 '금융지주‧은행 지배구조 모범관행'을 보고 마음 한 구석 찜찜함을 거둘 수 없었다. "전체 은행권에 지배구조 모범관행 최종안을 공유하고 은행별 특성에 적합한 자율적 개선을 유도"라는 문구가 눈을 사로 잡았다.


금감원 측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 은행지주와 은행별로 스스로 개선하게끔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정기검사에서 활용하는 '경영실태평가'에 모범관행 준수 정도를 반영한다는 방침이다.


완전한 강제는 아니더라도 경영실태평가를 통해 모범관행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보겠다는 의도다. 


물론 지주와 은행이 실효성 있는 내부통제와 리스크관리를 통해 지속 성장하기 위해서 건전한 지배구조 확립이 필수라는 문제 의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지배구조 선진화라는 중장기적 목표를 너무 단기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뒤따른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변화에 따른 리스크를 충분히 고려한 뒤 이뤄져야 할 지배구조 변화가 모범관행 발표 뒤 바로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당장의 숙제가 됐기 때문이다. 몽둥이를 들고 있는 당국의 눈치에 어쨌든 말을 잘 듣고 있다는 리액션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테다.


실제로 지난해 12월에 모범관행이 발표됐고, 은행지주와 은행들은 당장 3월 주주총회에 가이드라인을 반영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사외이사의 독립성과 다양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모범관행에 따라 사외이사 수를 확대하고,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주주총회 한달 전 주주총회 소집결의 및 공고를 공시해야 하는 것을 고려하면 은행들이 새로운 사외이사를 찾는데 소요된 시간은 두달 남짓이다. 특히 금융사 사외이사는 금융업의 특성과 겸직 제한 조치 탓에 더욱 후보 선정에 애를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아직 타 사에서 사외이사 임기가 채 끝나지 않은 사외이사를 신규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하는 웃지 못할 일도 발생했다. 또 후보 선정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후보 중에 학계 측 인사가 다수 눈에 띈다. 상대적으로 사외이사 후보 추천이 용이하다는 이유에서다. 4대 금융지주 사외이사 후보 9명 중 절반이 넘는 5명이 학계 출신으로 분류된다. 사외이사 후보 군 중 여성이 4명으로 여성 참여 확대를 통한 성별 불균형은 다소 해소됐지만 학계 편중은 오히려 심화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12월 모범관행이 발표되고 은행지주와 은행들은 3월 주총에 이를 일부분이라도 반영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짧은 기간 동안 사외이사 평가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해당 금융사에 대한 이해가 수반된 인사인지, 그리고 사외이사의 다양성을 제대로 확보했는지 알 수 없다. 단순 숫자는 사외이사 수가 늘고 여성 사외이사 수도 증가했지만, 단순 수치 증가가 이사회 및 지배구조 선진화를 대변하긴 힘들다. 


당국의 눈치로 시작된 지배구조 선진화 과정이다. 자율이 아닌 타율에 의한 변화다. 시작은 이렇게 됐으니 과정이라도 자율로 진행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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