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래 영면
기술경영 통한 '산업보국' 일군 큰별
국내 민간기업 중 최초 연구소 설립, FTA 체결 주도 등 업적도 남겨,
이 기사는 2024년 03월 29일 19시 56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조석래 명예회장(제공=효성)


[딜사이트 송한석 기자] '기술 경영인'으로 불렸던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 30일 오전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살아 생전 산업보국을 실천하기 위해 기술 개발에 매진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주도하는 등 재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조 명예회장은 경기고등학교 1학년은 마치고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히비야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와세다 대학을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 박사 학위를 준비하다 아버지 조홍제 효성 창업주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그는 1970년 효성그룹의 주력사인 동양나이론(효성그룹의 전신) 대표이사 사장을 필두로 동양폴리에스터, 효성중공업 등 그룹의 주력계열사들을 맡아 왔으며, 선친인 만우(晩愚) 조홍제 효성 창업주가 별세하기 2년 전인 1982년에 효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2017년부터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조 명예회장은 기술 중시 경영인으로 유명하다. 생애 그는 '산업을 중심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창업이념으로 경영활동을 펼쳐왔다. 1971년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후 집념과 뚝심 경영으로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유럽시장 진출에 성공한 송배전설비 등 다양한 제품들로 세계시장을 선도해왔다.


이런 가운데 조 명예회장은 그룹 경영 뿐만 아니라 한국 재계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한미 FTA 필요성을 최초로 제기하며, 체결을 주도했던 게 대표적이다. 아울러 31·32대(2007년~2010년)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일자리 창출 ▲국제교류 활성화 ▲여성일자리 창출 및 일·가정 양성 확립 등에 기여했다


그는 생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꼼꼼한 성격이라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경영인으로서의 결단력도 지니고 있었다. 효성중공업 회장에 취임한 뒤 24개에 이르던 계열사들을 8개로 줄인 것에서 확인 가능하다. 이후 1998년에도 주력 계열사들을 합병하고 사업부문을 통합하는 등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진행했다.


아울러 조 명예회장은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소탈한 사람이었다. 부하직원이라도 전문지식과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받아들였다. 그의 이런 성격 덕에 임원들도 생각이 다르면 그건 틀린 것 같다며 건의하기도 했다. 


정철 전 효성물산 전무는 "홍콩 주재원 당시 경비실에서 '미스터 조'가 왔다며 연락이 와 내려가 보니 조 명예회장이 혼자 서 있었다"며 "깜짝 놀랐고 정말 소탈한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며 조석래 명예회장의 솔직함과 소탈함을 회상했다.


조석래 명예회장은 기술도 중요시 했지만 무엇보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올해의 효성인상 시상식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해 나가겠다"며 "연구부문에서는 독자기술을 개발해 경쟁력의 바탕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영업 일선에서는 가장 먼저 고객에게 달려가 그들의 소리를 듣고 고객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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