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병원 부지매각…‘출산성지’ 역사 속으로
후원자 이병철 전 삼성 회장과의 인연 회자

[딜사이트 남두현 기자] 제일병원 묵정동 부지가 결국 매각된다. 공개입찰 마감일인 5일까지 본입찰 참여 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음에 따라 조건부 예비인수자였던 파빌리온자산운용(옛 아시아자산운용)과 매각절차를 진행한다. 파빌리온자산운용의 실질 운영주체는 GS리테일로 알려져 있다.(관련 기사 5월28일자 GS리테일, 제일병원 부지 인수 ‘유력’)


부지가 매각이 되면 56년간 출산의 성지로 불리던 묵정동 시대도 역사 속으로 함께 사라지게 된다. 제일병원은 그 동안 수많은 이들의 기쁨과 감동이 서려있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기에 여운이 깊다. 1963년 개원 이후 25만 명의 신생아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등 삼성가 3~4세 등 주요 재벌 자제들도 여기서 태어났다. 60년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김지미씨를 비롯해 배우 고현정, 이영애부터 최근 가수 백지영씨까지 유명 연예인들도 이 병원에서 출산했다.


1963년 5월 제일병원 신축 공사 사진

부지매각 이슈로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과의 인연도 함께 회자된다. 56년 전 제일병원 개원에 결정적 도움을 준 후원자가 바로 이 회장이기 때문이다. 제일병원 설립자인 이동희 박사는 이병철 회장의 큰 형인 이병각씨의 장남이다. 때문에 이 회장은 삼성가 큰 조카였던 이 박사를 어렸을 때부터 각별히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제일병원 개원을 주도한 인물은 세브란스 산부인과 교수였던 이동희 박사와 노경병 박사다. 노 박사는 현 미즈메디병원 설립자로 1996년 이 박사가 타계할 때까지 30년을 넘게 제일병원을 함께 운영해 왔다. 당시 일본과 미국에서 각각 유학을 마친 두 사람은 선진 의료기술 실현의 꿈을 위해 공동으로 병원건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병원걸립을 위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자금이었고, 이를 해결해 준 인물이 이 회장이다. 이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이 회장은 조카의 병원건립을 반대했다고 한다. 사업가의 눈에 병원은 큰 사업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학교에 남아 연구에 매진할 것을 권했으나 조카의 강한 의지에 결국 후원자로 돌아선다.


제일병원 20주년을 기념한 이병철 회장 자필 휘호

지금 병원건물 위치인 묵정동 대지는 당시 제일제당 부지였다. 이 회장이 이곳을 병원 신축부지로 출연을 결정함으로써 병원건립이 가능했다. 당시 이 회장이 출연하고자 했던 제일병원 터는 묵정동이 아니라 안국동 부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빈터였던 묵정동이 보다 빠른 착공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이 박사의 고집으로 병원은 현 위치에 들어서게 됐다. 착공 이후에도 자금조달 고비 때마다 이 회장이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제일병원 브랜드 역시 이 회장의 철학이 반영된 이름이다. 당시 제일제당을 비롯해 ‘제일’의 기업을 지향하는 삼성의 철학을 계승해 ‘제일 좋은 진료’ ‘제일가는 병원’이 되겠다는 미션과 비전이 담겨져 있다.


병원은 설계단계부터 당시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구조전문가로 꼽히던 배기형씨가 맡으며 화제를 모았다. 1963년 12월 개원식과 함께 이틀간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오픈하우스 행사에는 수도권 대부분의 의사들이 구경 왔을 정도로 국내 기술로 지어진 국내 최초의 현대식 병원건물로 기록된다.


이후 제일병원은 ▲자궁암 조기진단센터 설립 ▲국내 최초 초음파진단법 도입 ▲국내 최초 복강경수술법 도입 ▲민간병원 최초 시험관아기시술 성공 ▲역대 신생아 분만건수 1위 ▲국내 최초 여성암센터 건립 등 대한민국 여성의학 발전을 이끌어 온 대표병원으로 성장해 왔다.



설립자 이동희 박사 타계 이후는 유언에 따라 경영권이 삼성으로 넘어 갔다. 삼성 브랜드 시너지가 더해지며 2006년까지 꾸준한 성장이 이어졌고 한 때 연간 분만건수가 1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최고의 호황기를 맡이 했다.


하지만 2006년 이 박사의 장남인 이재곤씨가 이사장으로 취임하며 10년만에 삼성과 분리됐다. 이후 연이은 대규모 공사에 따른 부채증가와 인사 실패, 저출산의 여파로 2013년부터 쇠락을 맞으며 결국 올해 초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의료계 한 관계자는 “제일병원을 지켜본 의료인들이라면 현 제일병원의 몰락은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환자 중심의 진료시스템이 철저했던 병원으로 환자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던 병원이다. 환자는 물론 의료업계 차원에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제일병원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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