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금융에 가려진 사람
네이버·카카오 등에 소액후불결제 부여···신불자 양산한 2002년 '카드대란' 데자뷰
이 기사는 2020년 08월 27일 09시 28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팍스넷뉴스 이규창 금융증권부장] 카드 할부 결제는 매력적이다. 당장 필요하지 않거나 고가의 제품을 매입할 때 할부결제는 추후에 발생할 결제 집중에 따른 재무 부담을 덜게 한다. 거기에 '무이자'가 붙으면 충동구매의 찜찜함마저 희석시킨다. 추후 재무 관리의 실패를 예상하거나 그런 일을 실제로 겪으면서 할부 결제를 자제하기도 하지만 이내 합리적 소비라고 자위하며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일종의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에 의한 '자기합리화(self-justification)' 단계에 진입하는 것이다.


경제적 능력이 있고, 계획 소비를 할 만큼 자제력이 있는 사람에게 카드 무이자 할부 결제는 합리적 소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카드 할부 결제시스템은 독이다. 과거 카드 대란이 이를 여실히 보여줬다.


카드대란은 2000년대 초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내수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 폐지, 소득공제 및 영수증 복권제도 시행 등 신용카드를 밀어주면서 발생한 후유증이다. 2002년부터 신용불량자 급증, 가계 파산, 카드사 부실, 금융시장 교란 등이 연이어 나타났다. 당시에는 카드를 매개로 한 소비 패턴의 변화가 세련된 삶의 상징인 것처럼 선전됐다. 특히 카드사들은 수입이 없는 대학생, 심지어 고등학생에게도 경품을 주며 카드 발급을 남발했다.



카드대란은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부와 경쟁적으로 고객을 유치하려는 카드사의 합작품이었다.


최근 이러한 카드가 남발되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정책이 눈에 띈다. 지난달 금융위원회는 '디지털금융 종합혁신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마이데이터(본인신용정보관리업)과 연계된 마이페이먼트(지급지시전달업)를 도입하고 전자금융업에 진출하는 규제를 낮추는 등 디지털금융의 발전을 위해 낡은 '전자금융거래법'을 전면 개편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는 빅테크·핀테크 기업의 금융업 진입이 보다 쉬워진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혁신방안 가운데 대금결제업자에 소액후불결제기능을 부여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결제대금 부족분(선불충전금과 결제대금간 차액)에 한해 최대 30만원까지 후불결제가 가능토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빅테크·핀테크 기업이 고객에게 최대 30만원까지 돈을 빌려주게 되는 셈이다.


금융위는 "사회초년생, 주부 등에게 디지털금융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부여하고 금융이력 축적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래도 네이버나 카카오 등 빅테크 기업의 플랫폼에 익숙한 젊은 층이 소액후불결제 서비스에 접근하기도 쉬울 것이다. 금융위는 사회초년생이라고 했지만 고객 유치 경쟁이 심화되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 연령이 더 낮아질 수도 있다.


금융위는 이를 의식한 듯 소액후불결제는 신용카드와 달리 현금서비스, 리볼빙, 할부서비스를 할 수 없고 이자도 받지 않게끔 제한을 뒀다. 또, 대손충당금 적립, 사업자간 연체정보 공유, 사업자별 후불결제 총액 제한 등의 규제를 통해 사업자의 건전성을 관리하고 이용자 보호체계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소액이더라도 연체한 고객은 신불자가 된다. 젊은 층이 사회에 진출하기도 전에 신불자 낙인이 찍힐 수 있다. 게다가 네이버, 카카오 등 빅테크 플랫폼 사용자 수와 특성을 고려하면 신용공여 후 연체 가능성이 크다. 신불자가 대거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디지털금융을 발전시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대(大)패러다임 전환에 대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개인의 정보이동권으로 대변되는 마이데이터 사업자 선정에도 금융회사, 빅테크·핀테크 기업, 유통기업까지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는 중이다.


디지털금융이 4차 산업혁명 시대로 가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 기점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 또한 완벽하지는 않다. 보안 문제나 금융 혁명, 빅테크 공룡 등의 논의도 중요하겠지만 정작 경쟁 과열에 따른 후유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소액후불결제 사례뿐만 아니고 금융감독원이 디지털금융의 또 하나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는 은행의 지점 통폐합에 제동을 걸고 있는데, 이게 정책 방향인지, 속도 조절인지도 불분명하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미국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머스 쿤(Thomas S. Kuhm)은 어떤 패러다임이 시대의 문제점 등을 해결할 답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틀렸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기존과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이라면 진정한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을 따르는 사람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이뤄지지 않는다고도 설명했다. 즉, 완벽한 패러다임은 없으며 갑작스러운 전환도 없다는 뜻이다.


현재 디지털금융을 둘러싸고 '네이버와 카카오 등 빅테크 기업이 앞으로 금융산업도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디지털금융 혁신방안이 만약 경제 관료와 IT권력의 합작품이라면 카드대란의 더욱 완벽한 데자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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