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철강 브랜드화가 주는 묵직한 울림
생산에서 고객 중심으로 철강 패러다임 전환
이 기사는 2020년 10월 13일 08시 42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딜사이트 유범종 기자] 등산화를 구매하려고 할 때 고어텍스 마크가 붙어있는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이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아마 가격에 대한 부담만 없다면 십중팔구 고어텍스 마크가 있는 제품으로 손이 갈 것이다.


'인그리디언트 브랜딩(Ingredient Branding)'이라는 개념이 있다. 최종제품이 아닌 소재를 만드는 기업이 자체 소재에 고유한 이름을 붙여 마케팅하는 전략이다. 미국 원단 제조기업인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이하 고어)는 인그리디언트 브랜딩의 성공 사례에서 빠지지 않는 기업이다. 고어사는 고어텍스라는 자체적인 원단 브랜드를 탄생시키며 일약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고어텍스의 인지도는 상상 이상이다. 일반 소비자 가운데 고어텍스는 알아도 그걸 생산하는 기업이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은 분명 많을 것이다.


사실 고어텍스는 등산복이나 등산화에 사용되는 원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고어사는 제품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원단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했고 아웃도어 제조기업 등이 고어텍스 원단을 사용할 경우 반드시 제품에 별도로 원단 이름을 새기게 했다. 이러한 전략은 고어텍스가 일반 소재와는 차별화된 원단이라는 인식을 소비자에게 각인시켰고 최종제품 브랜드보다 소재 브랜드가 구매를 결정할 때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효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중간재 산업인 철강도 이러한 전략을 차용한 제품 브랜드화가 유행을 타고 있다. 그 동안 국내 철강 제조기업들은 불량 없는 제품 생산과 차질 없는 고객 납기를 최우선적으로 신경 썼고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왔다. 대부분의 거래가 자동차, 건설, 조선 등 몇몇의 고정적인 수요기업(B2B)에 맞춰져 있다 보니 타 업종에서의 제품 마케팅이나 브랜드화는 먼 나라 얘기로만 들렸을 터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극심한 불황이 이어지며 수요가 급격히 위축되고 경쟁기업들이 하나 둘 추가되면서 이러한 제조 중심의 경직되고 수동적인 판매전략은 더 이상 시장에서 통하지 않게 됐다. 포스코,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 국내 굴지의 철강 제조기업 내부에서는 위기감이 확산됐고 나만의 차별화된 제품경쟁력을 내세울 수 있는 '인그리디언트 브랜딩' 전략으로 앞다퉈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철강산업의 패러다임이 드디어 생산자에서 고객 중심으로 전환된 것이다.


브랜드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알려진 미국의 사회과학자 데이비드 아커(David A. Aaker)는 기업의 브랜드 자산은 가격 프리미엄, 기존 고객과의 Lock-in, 신규 고객 유인을 극대화시키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고 주장했다.


최근 몇 년 동안 포스코의 자동차강판 브랜드인 기가스틸(GIGA Steeel), 현대제철의 내진강재 브랜드 'H CORE(에이치코어)', 동국제강의 건재용 컬러강판 브랜드 '럭스틸(Luxteel)' 등은 대표적인 철강제품 브랜드로 활약하고 있다.


이들 철강 브랜드 제품은 시장에서 고객들의 충성도를 높여 안정적인 공급처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 한편, 특화시장을 선점하는 선봉장이 되기도 하고, 때때로 수입산을 견제하는 방패로 쓰이는 등 다양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제 국내 철강산업에서 제품 브랜드는 기업 신뢰도를 대변하고 판매와 수익을 담보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은 셈이다.


철강산업은 분명 위기다. 위기의 끝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 그 동안의 오래된 관행을 버리고 또다른 변화를 시도하는 국내 철강기업들의 행보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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