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창의 窓]
질 들뢰즈가 '노마드' 이재용에게
'현재 반도체 뚝심' 응원하지만 '미래 반도체 해체'도 고민해야
이 기사는 2023년 04월 05일 08시 54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질 들뢰즈(왼쪽. 출처=교보문고)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제공=삼성전자)


[이규창 편집국장]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지난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열고 간단한 농산물과 '별표국수'를 팔았지만 타 업체 경쟁에 밀려 폐업해야 했다. 절치부심한 그는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고 1948년 삼성물산공사로 키워냈다. 6.25전쟁 이후 설탕, 양복 옷감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1958년에는 안국화재 인수를 시작으로 동방생명, 동화백화점 등을 사들였다. 1968년 수원 공단부지를 매입해 삼성전자, 삼성-SANYO전기를 세우고 1973년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사업으로 외연을 넓혔다. 반도체가 삼성그룹의 주력으로 성장한 시기는 한참 후의 일이다.


별표국수가 반도체로 바뀌기까지 삼성그룹 사업의 인수와 해체가 무수히 있었다. 신세계백화점(신세계그룹)과 전주제지(한솔그룹), 제일제당(CJ그룹)이 친족분리를 통해 떨어져 나갔고 석유화학 계열사를 대거 매각했다. 그 사이 제약바이오, 자동차용전지, 의료기기, 발광다이오드(LED), 태양전지 등 이른바 5대 신수종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삼성그룹의 2세 고(故) 이건희 회장이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하면서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고 독려했다. 그러나 10년도 지난 현재 반도체는 여전히 삼성그룹의 주력사업이다.


현재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은 위기를 맞았다.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하락하고 출하량은 줄고 있다. 1분기 또는 2분기에 반도체 부문을 포함해 분기 적자라는 낯선 성적표를 받아 들지도 모른다. 막대한 R&D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미국과 중국도 목을 조여 온다. '반도체 굴기'를 가속화하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는 미국 사이에서 죽을 맛이다. 최근 미국 상무부는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는 기업에 보조금 지급을 전제로 정보 제공과 중국 투자 제한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요구한 정보가 가히 깡패 수준이다. 상위 10대 고객, 가동률, 예상 웨이퍼 수율은 물론이고 반도체 생산시설 공개도 요구했다. 보조금 줄테니 영업 기밀을 넘겨달라는 말과 다름없다.


이렇게 어려운 와중에 삼성전자는 인위적인 감산 없이 막대한 적자를 감내할 작정이다. 반도체 혹한기에 '초격차'를 더욱 벌리겠다는 뜻이다. 역시 우리나라 기업인 SK하이닉스로서는 죽을 맛이지만 경험상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뚝심은 훗날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 때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추위를 견뎌야 하고 경쟁 우위에 한 계단 올라섰을 때 외부의 견제는 더욱 심해지겠지만.


뜬금없이 미셀 푸코, 자크 데리다와 함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인 질 들뢰즈를 소환해 본다.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로 생각한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와 한국의 1위 기업 오너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나 고정가치와 해체라는 공통 주제로 동일선상에 놓고자 한다.


들뢰즈는 과거 철학이 가치를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방식이라고 보고 어떤 존재가 다른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진다는 유목적(노마드. nomad) 사유방식을 주장했다. 모든 가치를 한 자리에 고착시키는 구조에서는 변화의 가능성이나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을 만들고, 개념을 사유하고, 개념을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보통 기업은 수요가 감소하고 가격이 떨어지면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방어하고 손실을 줄이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 회장은 감산 대신 정면돌파를 선언했다. 외부 도전에 방어가 아닌 공격을 외쳤다. 어찌 보면 고정된 경영방식을 거부한 셈이다. 우리나라 수출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반도체와 그 핵심 기업인 삼성전자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반도체는 포기해서도, 포기할 수도 없는 핵심 사업이라는 뜻도 된다. 현재 반도체는 이 회장, 아니 삼성전자, 한국에는 고정된, 불변의 가치라는 말이다. 하지만 중국의 '반도체 굴기'나 미국의 '주도권 결기'가 심상찮다. 언젠가는 반도체가 아닌 다른 사업이 삼성전자의 또는 한국의 핵심 사업이 된다. 반도체도 영원할 수 없다. 삼성그룹이 매각한 수많은 사업처럼. 


무리한 주문일 수 있으나 이 회장은 반도체를 대체하는 사업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나아가 반도체사업 해체까지. '노마드' 이 회장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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